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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의 그림 속에 숨겨진
1차 산업혁명의 경제사
영국의 국민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영국 문학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영국 풍경화에는 터너가 있다”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터너를 향한 영국인들의 깊은 사랑과 존경은 터너의 예술적 기여도와 그가 영국 문화에 미친 영향에서 비롯됐다. 특히 다음에서 소개하는 터너의 두 작품은 영국 해양 역사와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미술과 경제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글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윌리엄 터너,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1839.
터너는 템스강의 노을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웅장한 테메레르호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범선을 견인하는 강한 힘을 가진 작은 증기선의 모습을 대비시켰다. 이를 통해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혁신이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 줬다.
범선과 증기선의 대비가 상징하는 1차 산업혁명의 전환점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는 영국의 젖줄로 불리는 템스강을 배경으로 전함 테메레르호가 해체를 위해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테메레르호는 평범한 범선이 아니라 영국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영웅적인 전함이다.
이 전함은 범선 시대 최후의 해전 중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넬슨 제독이 지휘하는 기함 빅토리호 바로 뒤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며, 집중 포격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른 영국 함대가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드는 등 영국 해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로 영국은 세계 바다를 장악하며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테메레르호가 보여준 용맹함과 희생정신은 영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파이팅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게 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상징이자 영국민의 자부심이었던 테메레르호도 세월의 흐름을 이겨낼 수 없었다. 1838년까지 영국 해군에서 활약하다 퇴역한 이후 노후화로 수명이 다해 폐선으로 매각되며, 로더히스에 있는 조선소에서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영국 언론은 군 복무를 마치고 퇴역하는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여정을 앞다퉈 보도했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터너는 테메레르호가 예인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전설적인 전함의 퇴장을 기리는 풍경화로 영국의 해양 역사를 기념했다. 범선인 테메레르호는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전통적 운송수단으로 과거의 기술과 전통, 자연의 힘에 의존하는 구시대를 상징한다. 반면 테메레르호를 끌고 가는 증기선은 증기기관을 이용해 운항하는 새로운 기술의 산물이며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힘찬 도약을 상징한다. 터너는 템스강의 노을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웅장한 테메레르호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범선을 견인하는 강한 힘을 가진 작은 증기선의 모습을 대비시켰다. 이를 통해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혁신이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 줬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1844.
속도와 힘의 혁명, 터너가 그린 증기기관차와 영국의 경제 도약
영국의 발명가이며 공학자인 제임스 와트(1736~1819)의 증기기관 개발은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와트의 발명은 기술적 진보를 넘어 생산성 향상, 운송 혁명, 도시화 등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영국을 세계 최초의 산업 강국으로 이끌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주역을 담당했던 철도를 세계 최초로 건설한 나라였고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기관차를 처음 발명한 인물도 영국의 공학자인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철도산업은 영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터너는 빗속을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를 소재로 한 <비, 증기 그리고 속도>를 통해 영국이 세계철도의 역사를 만든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일깨워 줬다.
1825년 9월 27일 영국 스톡턴~달링턴 구간을 연결하는 세계 최초 철도 노선의 개통식을 겸한 시승 행사가 열렸을 때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철도는 도시와 시골 마을을 연결하고 마차 운송 비용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 신문, 잡지, 석탄 등 화물의 대량 수송을 가능하게 했다.
터너는 산업혁명 시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증기기관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것을 그림의 소재로 선택했다. 이 장면은 비 오는 날 런던과 브리스톨을 연결하는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의 기관차가 템스강 위 메이든헤드 철교를 지나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질주하는 증기기관차는 산업혁명의 속도와 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터너는 비와 안개에 젖은 대기와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 속도감을 강조하기 위해 풍경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표현 기법을 선보였다. 철도를 대각선 방향으로 배치하고, 관객이 기차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기관차 전면부와 석탄이 타는 연실, 수증기를 내뿜는 굴뚝은 강조한 반면 차량의 나머지는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비를 머금은 대기 속으로 스며들게 흐릿하게 표현해 속도감과 힘을 느끼게 했다. 기술 혁신의 상징인 기관차와 자연 현상인 물, 불, 공기가 하나가 된 이 작품은 터너가 왜 ‘대기의 화가’이며 ‘인상주의의 시조(始祖)’로 불리는지 알려 준다.
터너가 기계 에너지와 자연 에너지를 그림에 실감나게 표현한 비결이 있었다. 그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그림을 그리는 작업 방식을 선호했다. 이 작품에도 화가의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난 현장감을 강조한 터너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터너는 비 오는 날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를 달리는 기관차를 타고 메이든헤드 철교를 건너는 경험을 했다. 그는 폭우 속에서 기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속도감을 직접 느끼며 주변 풍경을 관찰했다. 이처럼 터너의 두 작품은 1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혁신과 사회 변화를 예술적으로 탐구한 결과물로,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윌리엄 터너, <자화상>, 1799.
터너의 초기 작품인 이 자화상은 젊은 터너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의 결연한 표정과 진지한 자세에서 작가로서의 열정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영국 20파운드 지폐
영국중앙은행(BOE)은 2020년부터 유통된 20파운드 지폐의 도안으로 터너의 자화상과 함께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작품을 선택해 그의 업적을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