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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그림을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만든 사람

2022년 11월 9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이 1억1,720만달러(약 1,600억원)에 낙찰되어 고흐 작품의 최고가를 경신했다. 3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점의 그림을 400프랑이라는 헐값에 팔았던 무명 화가의 작품이 왜 사후에는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극적인 전환에는 반 고흐의 제수 요한나 봉거의 마케팅 전략이 핵심 역할을 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 사진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Orchard with Cypresses), 1888.
1888년 봄, 프랑스 아를에서 빈센트가 완성한 꽃이 만발한 과수원 연작 열네 점 중 한 점이다. 봄이 다가오는 프로방스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쁨과 희망을 표현했다.

빈센트 반 고흐 이미지

빈센트 반 고흐, <테오의 초상, 또는 자화상>, 1887.
반고흐미술관 소장

큰아버지의 자화상을 손에 들고 있는 빈센트 빌렘 반 고흐 이미지

큰아버지의 자화상을 손에 들고 있는 빈센트 빌렘 반 고흐

“사실 이건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테오 너뿐이고,
그렇게 괴로울 때마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너야.” -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

“사실 이건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테오 너뿐이고, 그렇게 괴로울 때마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너야.” -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

빈센트 반 고흐의 유일한 후원자, 테오

빈센트의 남동생 테오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딜러 회사인 구필앤드시의 이사이자 성공한 미술상이었다. 그는 오랜 경험을 발휘해 형의 미술 경력을 관리하고 작품 세계를 알리는 데 헌신했다. 빈센트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흔들릴 때 “나는 형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소. 언젠가 베토벤과 비교될 만큼 위대한 예술가로 이름을 남길 것이오”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경제적 무능력자인 형이 온전히 창작에 집중하도록 매달 생활비와 미술 재료를 제공하는 등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1890년에 신고된 테오의 연봉은 8,247프랑(약 4,550만원)인데, 그중 1,800만원을 빈센트에게 보냈을 정도다.

테오는 형제간의 강한 유대감과 정서적 지지도 빈센트에게 평생토록 제공했다. 두 형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했다. 1872년부터 빈센트가 죽기 전인 1890년까지 둘 사이에 오간 편지는 668통에 이른다. 1889년 빈센트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라고 적혀 있다. 동생에 대한 감사와 약속, 예술에 대한 열정이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1890년 7월 29일, 파리 근교 오베르에서 총상을 입은 빈센트는 이틀 후에 37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테오는 빈센트의 죽음 이후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심신이 완전히 무너졌고, 형이 죽은 지 6개월이 채 안 되는 1891년 1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미술 비즈니스의 문외한이 대규모 전시회를 조직하기까지

빈센트는 예술가로서 명성을 얻지 못한 채 요절했고, 그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작품을 관리하던 테오마저 사망했다. 사후에 인정받을 기회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반 고흐의 작품과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테오의 아내이자 빈센트의 제수인 요한나 봉거다.

테오는 29세의 젊은 아내에게 한 살이 안 된 아들 빈센트 빌렘과 반 고흐의 회화 약 200점, 수백점의 스케치, 두 형제가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가 쌓인 파리의 아파트를 유산으로 남겼다. 요한나가 상속받은 반 고흐의 작품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니 그녀는 애물단지를 떠맡은 셈이었다. 게다가 요한나는 미술 비즈니스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요한나에게는 강인한 의지와 남편에게서 배운 예술적 안목이라는 특별한 자산이 있었다. 테오는 생전에 남다른 감식안으로 반 고흐를 비롯해 고갱, 피사로, 로트렉 등 진보적 예술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그의 뛰어난 사업 감각과 공격적인 판매 성향은 요한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한나에게는 현대미술에 대한 교육 자료도 풍부했다. 테오와 요한나 부부가 반 고흐의 그림 수백점이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반 고흐의 작품이 가득한 주변 환경은 현대미술에 대한 요한나의 안목을 길러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요한나는 홀로 어린 아들을 돌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소장품의 가치를 높일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파리를 떠나 고향인 네덜란드 부섬으로 이주해 하숙집을 운영하며 그곳을 반 고흐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변모시켰다. 나아가 화가와 화상, 미술 비평가를 하숙집으로 초대해 반 고흐의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화상, 예술가, 미술관과 협력해 네덜란드 전역에서 약 스무 번의 성공적인 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녀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905년에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시립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작품 484점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회를 조직한 일인데, 이 전시회는 반 고흐의 예술 세계가 재평가되고 대중의 관심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요한나 반 고흐-봉거 이미지

요한나 반 고흐-봉거(Johanna van Gogh-Bonger)와 요한나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요한나는 반 고흐가 삶과 예술에서 실패한 미친 화가라는 편견을 버리고 시아주버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모습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 고흐 형제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다

그녀가 힘든 현실 속에서도 소장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숨은 동기는 반 고흐가 남긴 수백통의 편지였다. 이 편지들은 그의 감정과 생각, 예술 철학뿐만 아니라 정신 질환에 따른 고통과 인간적인 고뇌를 담고 있었다. 편지를 읽은 요한나는 반 고흐가 삶과 예술에서 실패한 미친 화가라는 편견을 버리고 시아주버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모습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나는 외롭고 길을 잃었다. 하지만 내 삶에는 사명이 있다. 빈센트의 편지들을 읽고 또 읽다가 마침내 그의 모습이 내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라는 그녀의 일기에서도 나타난다.

1914년, 요한나는 빈센트와 테오의 서신을 편집해 네덜란드어로 출판했다. 이 서간집은 반 고흐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집념,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그를 고통받는 천재로 대중과 미술계에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과 전략적 마케팅으로 빈센트의 작품은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미술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1925년에 63세의 요한나가 사망한 이후 그녀의 소장품은 아들인 빈센트 빌렘 반 고흐에게 상속되었다. 빌렘은 자신의 이름이 큰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상속받은 작품이 반 고흐 형제의 영혼과 철학이 담긴 위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반 고흐의 예술세계를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마침내 1973년 6월 3일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어 빈센트의 작품들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한나는 반 고흐 형제가 위대한 예술가이자 탁월한 화상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진정한 영웅이다. 그녀는 시아주버니와 남편의 서신 출판, 전시회 조직, 미술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반 고흐의 삶과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 고흐와 그가 사랑한 예술가들』(Van Gogh and the Artists He Loved)의 저자인 스티븐 나이페(Steven Naifeh)는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창의적 경영 전략으로 반 고흐를 예술의 아이콘으로 만든 요한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요한나 봉거가 없었다면 빈센트 반 고흐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 사진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Almond Blossoms), 1890.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이름을 딴 조카 빈센트 빌렘의 출생을 축하하는 선물이자 죽기 전 봄에 그린 마지막 꽃 그림이다.